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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전투 -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깨뜨린 전투

by Jose01 2023.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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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전투(Battle of Austerlitz)는 1805년 12월 2일 아우스터리츠에서 나폴레옹 1세의 프랑스 군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동맹군과 치른 전투입니다. 이 전투의 배경과 원인, 그 과정과 결과를 알아봅니다.

목차

1.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배경과 원인

2.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과정

3.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특징

4.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결과와 영향


1.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배경과 원인

불안에 떠는 유럽 대륙 국가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세 황제가 관련되어 삼제회전(Battle of the Three Emperors)으로도 불립니다. 1804년 프랑스에서 제1국이 설립되고 나폴레옹 1세가 스스로 대관식을 하며 황제로 즉위하자 유럽 대륙 국가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합니다.


제3동맹국을 조직한 영국 총리 윌리엄 피트

이에 영국 총리였던 윌리엄 피트는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나폴리와 시칠리아 등으로 구성된 제3동맹(Third Coalition)을 조직하고 1805년 8월부터 총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805년 10월에는 영국이 스페인 남서쪽의 트라팔가르 해전(Battle of Trafalgar)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나폴레옹은 영국에 상륙하려는 야망을 당분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나폴레옹의 군대는 과도하게 확장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황제가 이끄는 동맹군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오스트리아 군대의 상황

라이베리히(Leiberich)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군대는 바이에른으로 가서 미하일 쿠투조프(Mikhail Kutuzov)가 이끄는 러시아 지원군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군대가 늦게 출발한 데다 오는 동안 많은 방해를 받아 지연되자, 마크 사령관은 울름(Ulm)으로 가 기다렸습니다.


라인강을 건넌 나폴레옹

한편 나폴레옹은 21만 병력을 이끌고 1805년 9월 25일 라인강을 건너 10월 7일 다뉴브강둑에 도달합니다. 마크는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곧 프랑스군이 울름을 포위하고 오스트리아 군이 갇히게 됩니다. 쿠투조프 지원군이 100마일 이상 떨어져 있는 상황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늦게 브라나우에 도착한 쿠투조프의 러시아군은 주요 전투를 피하려 동쪽으로 후퇴 결정을 내리고, 다뉴브를 향해 철수하는 동안 뮈라(Murat)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 기병대의 추격을 받습니다.


빈에 입성한 프랑스군

11월 5일 페테르 바그라티온(Bagration)은 암스테텐(Amstetten)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합니다. 그리고 추격을 포기한 뮈라(Murat) 원수는 11월 13일 속임수를 사용해 타보르(Tabor) 다리를 점령하고, 다음날 프랑스군이 빈(Vienna)에 입성합니다.


2.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과정

적으로 둘러싸인 나폴레옹

오스트리아의 빈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지리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게 됩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이게 되었고 적진 깊숙이 들어와 있는 상태라 도시 수비나 보급선 방어를 위해 군대를 확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증가하는 동맹군의 힘

반면 동맹군의 힘은 갈수록 증가하여 올로모우츠(Olmutz)의 동맹군은 이제 9만 명으로 늘었고,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와 신성 로마 황제 프란츠 2세(Francis II)도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탈리아에 구금된 샤를 대공(Archduke Charles)이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상태였으며, 중립을 지키고 있는 프로이센까지 동맹군에게 합류하게 된다면 프랑스로서는 엄청나게 커져 버린 동맹군을 대적하기가 더 힘들어질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동맹군이 몰려오기 전에 빨리 작전을 행동에 옮기기로 하고,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동맹군들을 보내어 자신을 공격하게끔 속임수를 쓸 계획을 세웁니다.


프라첸고원 점령

1805년 11월 21일 나폴레옹은 자신의 군대 3분의 1을 차지하는 장드디외 술트(Jean-de-Dieu Soult)의 4군단과 장 란(Jean Lannes)의 5군단을 올로모우츠 길목의 브루노(Bruun)와 비슈코프(Wischau)로 보내어 아우스터리츠 근처 프라첸고원을 점령하도록 합니다. 한편 프랑스 뮈라 원수의 기병대 여단은 비슈코프로 진격했습니다.


속임수를 쓰는 나폴레옹

11월 15일 나폴레옹은 안장마리사바리(Anne-Jean-Marie Savary) 장군을 동맹군 진영으로 보내 휴전 요청을 하고, 자신은 전투하고 싶지 않음을 알려 동맹군 사령관들을 놀라게 합니다. 마침내 나폴레옹이 자신의 군대를 프라첸고원에서 철수하자 동맹군은 프랑스군이 이제 방어력이 없으니 저런 유리한 위치를 포기한 것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쿠투조프 사령관은 나폴레옹을 영토 깊숙이 끌어들이려면 뒤로 후퇴할 것을 황제에게 권합니다. 이에 당시 27세였던 알렉산드르 1세는 그러면 러시아가 겁쟁이처럼 보이지 않겠냐며 즉각 공격하라고 지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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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전투의 나폴레옹과 랍 원수를 그린 유채화(프랑수아 제라르, 1810년)


함정에 빠진 동맹군

11월 30일 동맹군은 비슈코프에서 프랑스 기병여단을 무찌르고 아우스터리츠를 향해 나아가 12월 1일 프라첸고원을 오릅니다. 동맹군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폴레옹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랑다르메의 우측을 의도적으로 확장해서, 빈에서 올라오고 있는 베르나도트(Bernadotte) 원수와 다부(Davout) 원수의 군단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게 할 계획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계획

한편 오스트리아 참모 베이로더(Weyrother)는 프랑스군의 우측을 공격해 돌파하면서 자신은 북쪽으로 돌아 나폴레옹의 군대를 포위할 계획을 세웁니다. 또한 바그라티온(Bagration) 휘하의 군은 프랑스군의 좌익을 공격하고, 중앙은 러시아 제국 근위대와 콘스탄틴 대공이 공략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폴레옹의 계획

이에 비해 나폴레옹의 계획은 다부 원수가 도착할 때까지 술트(Soult) 원수의 4군단이 우측을 방어하고, 장 란 원수의 5군단은 좌측에 자리 잡도록 해, 동맹군 대부분이 교전에 들어가면, 약해진 틈을 타 중심을 다시 탈환하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접전

이후 텔니츠(Tellnitz)와 소콜니츠(Sokolnitz) 마을에서는 프랑스군과 러시아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습니다. 좌익은 란 원수의 5군단과 교전했고 블라조비체(Blasowitz)에서도 교전이 계속되었습니다. 오전 9시 동맹군은 프랑스군 우익에 4만 명을 투입했고, 동맹군의 중심이 약해진 것을 보자, 술트(Soult) 원수에게 공격을 명령합니다. 마침내 승리를 상징하는 듯한 아우스터리츠의 태양이 떠올라 짙게 깔렸던 안개를 거두자, 그 아래에 포진하고 있던 수천 개의 프랑스군 총검이 반짝였습니다. 이를 보고 동맹군은 매우 놀랍니다.


프라첸 마을에서의 전투

쿠투조프는 오스트리아군에게 고지로 올라오라고 명령하고, 프라첸 마을에서 무자비한 전투를 폅니다. 바그라티온은 좌측에, 벅쇼베덴은 프랑스군 우측에 묶여 동맹군은 두 동강이 난 상태가 되었으며, 이제 남은 군은 러시아 제국 근위병밖에 없었습니다. 콘스탄틴 대공은 고지를 탈환할 목적으로 근위병 기병대 4개 대대를 이끌고 프랑스를 돌격하나 후퇴합니다. 이에 프랑스는 제국 근위병 기병대 5개 중대를 보내 프라첸고지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치릅니다. 결국 러시아 근위병대는 파괴되어 동맹군의 승리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남쪽으로 후퇴하게 됩니다.


3.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특징

7개 군단으로 구성된 그랑다르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기억할 만한 특징으로 우선 그랑다르메을 들 수 있겠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그랑다르메로 불렸는데, 총 7개의 군단으로 구성되어 각 군단은 원수가 이끌었으며, 평상시에는 따로 반자율적으로 움직이다 전투가 벌어지면 빠르게 이동해 함께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조직이었습니다. 이런 군단을 이끌었던 원수 장 란과 조아생 뮈라(Joachim Murat)는 나폴레옹의 절친이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특이한 유인 전술

또 다른 특징으로는 나폴레옹의 특이한 전술을 들 수 있겠습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에 비해 자신의 그랑다르메(La Grand Armée)가 힘이 약한 점을 파악하고, 공격보다는 자신이 바라는 곳으로 적을 유인해 전투시키는 속임수를 사용했습니다.

보통 어느 전투이든 고지를 점령하는 쪽에 더 승산이 높다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프라첸고지를 일부러 내어주는 방식으로 적을 유인하는 등 나폴레옹이 아니라면 아무도 쓰지 않을 전술을 썼습니다. 또한 적진으로 장군을 보내어 자신은 전투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을 피력하고, 또 자기 군사를 철수하는 척하는 등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가능한 모든 책략을 사용했습니다.


호수를 향해 쏴라

그리고 전투 마지막 무렵, 동맹군이 완전히 후퇴할 때, 나폴레옹은 후퇴하는 동맹군 대신 얼어붙은 호수를 향해 대포를 쏘라고 명령합니다. 이때 퇴각하던 2,000명의 러시아군이 부서지는 얼음 속으로 빠져 죽었다는 얘기가 있으나 사실 2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4.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결과와 영향

나폴레옹의 결정적 승리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결과로 프랑스군은 1,300여 명이 사망하고 7,000여 명이 다쳤지만 동맹군의 손실은 이보다 훨씬 컸습니다. 러시아군 11,000여 명과 4,000명의 오스트리아인이 아우스터리츠 들판에서 다치거나 사망해 방치되어 있었고, 12,00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나폴레옹에게 결정적인 승리가 되었습니다.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종료

한편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2세는 휴전을 요청하여 프레스부르크(Pressburg) 화약을 맺고, 많은 영토를 양도하는 것은 물론 거액의 배상금까지 지급합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영향으로 다음 해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를 가져오게 되는 발판이 마련됩니다. 그리고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패배 후 헝가리로 철수했으며, 비로소 유럽 대륙에서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막을 내립니다.


나폴레옹의 전성기 전투

무엇보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나폴레옹의 전성기를 상징하며 세계 역사상 아주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이후 프랑스는 10년여간 유럽 대륙에서 군사적으로 절대적 우위를 누리게 됩니다.

(참조 문헌: World History Encyclopedia, 아우스터리츠 전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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