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키르만 전투(Battle of Aboukir Bay)는 1798년 8월 1일과 2일 아부키르만에서 영국 함대가 프랑스 함대를 크게 무찌른 해상 전투입니다. 이 전투의 배경과 원인, 과정, 그리고 결과에 대해 알아봅니다.
목차
1. 아부키르만 전투의 배경과 원인
아부키르만 전투는 나일강 전투(Battle of the Nile)라고도 부릅니다. 이 전투의 배경과 원인을 우선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전한 골칫거리 영국
1798년 초가 되자 프랑스혁명전쟁이 점차 수그러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난 5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실행하면서, 프랑스 공화국의 동맹들은 북이탈리아와 여러 국가들을 침략해 손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완강히 평화를 거부하고 있던 터라 여전히 골칫거리였습니다.
젊은 장교의 제안
젊은 장교였던 나폴레옹은 묘안을 제시합니다. 이집트를 침공해 식민지를 건설하고 기지를 세울 수만 있다면, 당시 인도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영국을 견제할 만할 것이라고 본 겁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 안은 정부에서 승인됩니다. 프랑스 총재 정부(French Directory)가 되도록 나폴레옹을 파리에서 멀리 보내기를 바랐던 이유도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3월과 4월, 35,000여 명의 군사를 모으고, 최측근에게도 목적지를 비밀에 부칩니다.
2. 아부키르만 전투 과정
아부키르만 전투가 진행된 과정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프랑스 군단 소집
툴롱(Toulon) 항과 지중해 연안 항구에 모인 프랑스의 군단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선상선 13척, 호위함 13척, 소형 호위함과 범선 23척, 그리고 다양한 크기의 수백 척 수송선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기함 로리앙 호(L'Orient)는 3층짜리 124발 규모의 거대한 선박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인력 보충을 위해 어부들은 물론 포로까지 선원으로 모집했습니다. 그리고 총지휘는 45세의 부제독 브뤼예(Brueys d'Aigalliers)가 맡았습니다.
비밀에 부친 탐험 목적
탐험 목적은 소수만 알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목적지를 철저히 감추었기에 영국 간첩들은 프랑스가 뭘 계획하고 있는지를 알아내지 못합니다. 영국 내각에서도 나폴레옹의 목적지를 두고 의견이 갈렸습니다. 결국 지중해 함대 사령관인 빈센트(St. Vincent) 부제독이 전함 세 척을 해군 소장 호라시오 넬슨(Horatio Nelson)에게 주어 프랑스 함대 정찰을 맡깁니다.
젊은 해군 소장 넬슨
당시 넬슨은 39세로 젊은 해군 소장이었습니다. 1794년 칼비(Calvi) 포위 전에서 오른쪽 눈을 잃었고, 3년 후 산타크루스 데 테네리페 전투(Battle of Santa Cruz de Tenerife)에서 포도 탄에 맞아 오른팔을 결국 절단해야 했습니다. 이제 막 부상에서 회복하고 있을 때, 빈센트 부제독으로부터 명령받고, 넬슨은 5월 2일 기함 뱅가드 (Vanguard) 호에 오릅니다.
하지만, 5월 12일 툴롱 앞바다에서 머무르고 있었을 때 폭풍우가 몰려와 넬슨 전대의 배들이 흩어졌으며 뱅가드 호의 돛대도 부서집니다. 5월 27일, 넬슨이 기지로 돌아오자, 프랑스군은 이미 출항하고 없었습니다. 6월 7일, 빈센트 부제독은 다시 10척의 최신 선박들을 지원하며 프랑스 함대를 해치우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몰타 함락
5월 19일, 역시 폭풍으로 출발이 지연되었던 프랑스 함대는 툴롱 항을 떠나 6월 10일 몰타(Malta) 해안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함대가 항구에 진입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성 요한 기사단(Knights of St. John)이 들어주지 않자, 나폴레옹은 침략 명령을 내리고 별로 큰 저항 없이 몰타를 함락하게 됩니다. 며칠 이곳에 주둔하는 동안, 프랑스군은 몰타 재무부가 보관하던 금, 은, 보석 등을 빼앗아 로리앙 호에 실어 둡니다. 6월 19일, 프랑스 함대는 다시 크레타 주변을 돌아 알렉산드리아로 출항합니다.
프랑스 함대와 영국 함대의 숨바꼭질
한편 제노바 상선과 마주쳤던 넬슨은 프랑스 함대가 실제보다 나흘 더 일찍 6월 15일에 몰타를 떠났다는 틀린 정보를 얻게 됩니다. 실제로 프랑스 함대와 영국 함대는 서로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짙은 안갯속에서 서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선원들은 영국 함선의 포 소리를 듣고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6월 28일, 넬슨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지만, 프랑스 함대는 없었습니다. 사실 아직 오지 않은 거였습니다. 이후 7월 1일, 드디어 프랑스 함대가 알렉산드리아 앞바다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 항구가 너무 얕고 방해물이 많은 터라 브뤼예 부제독은 알렉산드리아 항구 대신 아부키르만에 남아있기로 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이집트 사막을 향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갑니다.
이상적 방어선 아부키르만
아부키르만은 30km 폭의 만으로, 프랑스 함대에 이상적인 방어선이 될 것으로 보았습니다. 끝에는 작은 요새가 있는 반도가 있었고 모래톱과 바위가 해안가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부제독 브뤼예는 우선 상륙하기 쉽도록 함선들을 전선에 배치하고, 중앙과 후미에는 강력한 배들을 두었으며, 밧줄로 배들을 서로 연결해 전선을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약한 배들은 선봉에 두어서 큰 배들이 공격받을 때 반격하기 용이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습니다. 항구 쪽 함대와 모래톱 사이의 개방 수역이 너무 넓어 적함이 통과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이집트로 향하는 넬슨
프랑스가 이렇게 아부키르만에 정착하는 동안, 넬슨은 크레타 서쪽으로 항해 중이었습니다. 시칠리아에서 물품을 싣고 7월 28일 코로니(Coroni) 항에 정박하다 다행히 이곳에서 한 지역 오토만 통치자로부터 프랑스의 이집트 침공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8월 1일 넬슨은 즉각 이집트를 향해 출항합니다.
오후 2:30분, 넬슨이 보낸 젤러스(Zealous)호가 아부키르만에 정박 중인 프랑스 함대를 목격하고 신호를 보냅니다. 4시가 되자, 영국 배들이 반도를 둘러싸고, 프랑스도 영국 배를 발견해 냅니다. 브뤼예는 곧 어두워질 예정이라 넬슨이 공격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습니다. 마침 전투에 유리한 북서풍도 불어오자, 넬슨은 공격 명령을 내립니다.
해상 전투 개시
영국 전열의 선두에는 토머스 폴리(Thomas Foley)가 지휘하는 골리앗(Goliath) 호가 있었습니다. 골리앗 호는 좌초 위험을 무릅쓰고 해협으로 가다가 프랑스 선봉대를 공격하고, 게리에(Guerrier), 콩케랑(Conquerant) 호에 포를 발사해 막대한 피해를 줍니다.
폴리 선장이 큰 승리를 올리자, 영국의 젤러스(Zealous), 오리온(Orion), 어데이셔스(Audacious) 호도 골리앗 호를 따라 해협으로 들어갔으며, 넬슨은 나머지 배들을 바다 쪽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 군함들은 양측에서 영국 군함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로리앙 호에서 부제독 브뤼예와 얘기 중이던 함장들은, 영국의 공격 소식에 급히 각자의 배로 승선한 후 전투가 격화됩니다. 오후 8시, 콩케랑(Conquérant) 호가 항복하고, 이후 게리에(Guerrier) 호는 돛이 부서졌으며, 다른 프랑스 함선들도 많은 공격을 받습니다. 8시 30분쯤, 전투 도중 넬슨이 이마에 파편을 맞아 심하게 상처를 입었으나, 치료받은 후 다시 갑판으로 나와 지휘했습니다.
불타는 로리앙호
상황은 점점 악화하였고, 영국 함 베레로폰(Bellerophon) 호가 프랑스 전열 중앙으로 들어가 기함 로리앙 호와 마주치게 됩니다. 전력이 약했던 벨레로폰 호는 사상자를 내고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곧 로리앙 호는 더 큰 영국 함선 스위프트슈어(Swiftsure) 호로부터 공격받아 불에 탔고, 브뤼예 부제독은 날아오는 대포알에 맞아 사망합니다. 프랑스 선봉대의 배 두 척이 항복하고, 영국 머제스틱(Majestic) 호는 토낭(Tonnant) 호의 공격을 받고 선장까지 사망합니다. 스위프트슈어 호도 토낭 호에 사격을 가하고, 다른 영국 군함 알렉산더 호도 포격을 계속합니다.
3. 아부키르만 전투의 특징
아부키르만 전투에서 기억할 만한 특징으로 카사비앙카(Casabianca)라는 한 편의 시를 들 수 있겠습니다. 영국 함대의 공격으로 로리앙 호에 불이 났을 때, 선장 카사비앙카(Luc-Julien Casabianca)도 상처를 입고 옮겨집니다. 이때 13살짜리 아들 지오칸테(Giocante)는 갑판에 내버려 두었습니다. 곧 로리앙 호가 곧 폭발할 지경이 되자, 많은 선원이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지오칸테도 같이 뛰어들어야 했으나 자신은 아버지 곁을 지켜야 한다며 거부합니다.
아부키르만 전투 중 일어난 이 이야기는 나중에 영국의 여류시인 펠리시아 헤만스(Felicia D. Hemans)의 시, Casabianca(1826)로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시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The boy stood on the burning deck
(소년은 불타는 갑판 위에 서 있었다.)
4. 아부키르만 전투의 결과와 영향
막대한 피해를 입은 프랑스
8월 2일 아침 6시가 되자 아부키르만 전투의 결과는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기욤 텔 호(Guillaume Tell)를 지휘한 해군 소장 빌뇌브(Rear-Admiral Pierre-Charles Villeneuve)는 후퇴를 명령했습니다. 프랑스 프리깃함 디안(Diane)과 쥐스티스(Justice), 호위함 제네로(Le Genereux)와 기욤 텔만 아부키르 만에서 탈출하고, 나머지는 나포되거나 파괴되었습니다. 영국 측에서는 함선 벨레로폰 호와 마제스틱호만 심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프랑스군은 2,000명에서 3,000명의 사상자가 생겼으나, 영국군은 사망자 218명과 부상자 677명이 생겼습니다.
드높아진 영국 해군의 위상과 넬슨의 유명세
결국 아부키르만 전투의 영향으로 지중해에서 프랑스 해군의 힘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이후 아그레(Acre) 포위 전에서도 프랑스군이 대패해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또한 유럽의 여러 국가는 제2차 동맹을 결성해 대프랑스 공격을 시작하게 됩니다. 비록 트라팔가르 해전(1805년 10월 21일) 보다 덜 알려진 전투이지만, 넬슨은 아부키르만 전투에서 크게 승리해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영국 해군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참조 문헌: World History Encyclopedia, 나일 강 전투 편, 위키피디아, 나일 해전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