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 전쟁(Sikh Wars)은 인도의 펀자브 지방에서 1845~1846년에 한 차례, 그 후 1848~1849년에 또 한 차례, 시크교도와 영국 식민지군이 벌인 전쟁입니다. 이 전쟁의 배경과 원인, 그리고 영향에 대해 알아봅니다.
목차
1. 시크 전쟁의 배경과 원인
1차 영국-시크 전쟁
1845-1846 사이에 일어난 1차 영국-시크 전쟁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벌어진 처참한 충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인도회사는 북쪽으로 확장을 노렸으며, 시크 군대는 훈련이 잘된 군사와 장비도 잘 갖추고 열심히 싸운데도 불구하고 동인도회사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2차 영국-시크 전쟁
1차 영국-시크 전쟁으로 양측의 차이점은 물론 북서쪽 접경지의 지정학적 상황이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1848년 2차 영국-시크 전쟁이 발생해 1849년 동인도회사가 승리하고 영국은 펀자브(Punjab)를 제국에 합병합니다.
동인도회사의 확장
동인도회사는 무역회사로 시작해 18세기 중반 내륙을 가로질러 영토 확장을 하면서, 1757년 플라시(Plassey) 전투, 1764년 벅사르(Buxar) 전투, 세 번의 영국-마이소르 전쟁(1767-1799), 영국-네팔 전쟁(1814-1815), 세 번의 영국-버마 전쟁(1824-1885) 등을 치렀습니다. 다음 동인도회사의 목표는 인도 북서부와 펀자브(Punjab)였습니다.
독특한 시크 제국
한편 시크 제국은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인도 일부를 덮는 지역으로, 시크교도들은 구르마트(Gurmat)라는 신념을 따랐습니다. 힌두교와 다소 일치하는 점이 있는 독특한 종교로서, 자르지 않은 머리는 터번 안에 묶어 넣어두고 수염과 턱수염도 길게 기르는 등 외모가 아주 특이했습니다.
18세기에 무굴 제국이 점차 쇠퇴하자 시크는 국가로 확립했고, 제국 내에는 힌두인과 모슬렘이 소수 집단으로 존재했으며, 영토는 12개의 군대인 미즐(misls)로 나뉘어 지도자들끼리 느슨한 동맹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란지트 싱이 시크를 통일하다
시크를 실제로 통일한 사람은 란지트 싱(Ranjit Singh)(1780-1839)이었습니다. 싱은 1793년에 수케르차키아스 미즐(Sukerchakias misl)의 지도자 역할을 물려받아 아프간 침입자들을 물리치고 라호르(Lahore)를 지배했고, 1801년 자신을 마하라자(군주)로 천명하고 시크 군대를 개혁했습니다. 1802년에는 암리차르를 정복하고, 1809년 동인도회사와 암리차르 조약(Treaty of Amritsar)을 맺었습니다.
아프간과 조약을 맺은 동인도회사
동인도회사는 1차 영국-아프간 전쟁(1838-1842)에 참여했으나 전시 상황이 나빠지자, 시크의 확장을 걱정해 1839년 시크, 아프간과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북서 경계는 지금도 격렬한 논쟁이 이루어지는 지역으로, 특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카이베르 고개(Khyber Pass)는 아프가니스탄과 오늘날의 파키스탄을 연결해 주는 곳이며, 당시 아프간, 시크, 영국은 모두 이곳을 통제하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싱의 죽음 후 섭정 통치
1839년 6월, 싱의 죽음 후 시크 연합이 나뉘었고, 1843년 싱의 막내아들 듈레프 싱(Dullep Singh)(1838-1893)이 새 통치자로 선택되었으나 너무 어려 어머니 진드 카우르(Jind Kaur)(일명 라니 진단, d. 1863)가 섭정으로 통치했습니다.
더는 완충지대가 아닌 시크 제국
영국은 1843년에 신드 지방(Sindh)을 손에 넣었고, 펀자브에서 전쟁을 준비해 시크의 남서쪽으로 4만 명의 군대를 모았습니다. 시크 제국은 더는 완충지대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제국이 아프가니스탄과 북인도로 확장하는 경우, 이 두 제국 사이에서 시크가 독립을 유지하려면 싸워서 얻어내야만 했습니다.
시크 군대 vs 동인도회사
란지트 싱의 죽음 후, 탁월한 전투력과 장비를 갖춘 시크 군대 칼사(Khalsa)는 훈련이 소홀해졌으며 보수 문제도 심각해졌습니다. 이에 반해 동인도회사는 최소한 이 인도 지역에서는 시크 제국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훈련이 잘되어 있었고 장비도 잘 갖추고 있었습니다. 최신 머스킷(musket)을 갖추고, 영국군과 인도 세포이, 혼합 기병대와 정규 영국군의 연대를 고용하고, 네팔의 구르카(Gurkhas)로 전사를 고용해 보내는 등 풍부한 경험을 쌓으며 군인과 지휘관들의 사기는 높아갔습니다.
2. 시크 전쟁의 과정
시크의 선제 공격
1845년 12월 11일 동인도회사가 모든 방향에서 압박해 오자 시크가 먼저 공격했습니다. 시크 군대는 수틀레지강(Sutlej river)을 건너 동인도회사 영토로 들어가 1809년 암리차르 조약을 어기게 되고, 이에 동인도회사는 12월 13일, 시크 제국에 선전포고해 1차 영국-시크 전쟁이 발발합니다.
3개월간의 전투로 얻은 근소한 승리
3개월간 지속된 짧은 교전 동안 다섯 번의 큰 전투가 있었습니다. 첫 전투는 1845년 12월 18일 무드키(Mudki)에서 있었으며, 숙련된 시크의 포병 포대와 저격수에도 불구하고 동인도회사가 이겼습니다. 12월 21~22일에 일어난 두 번째 페로제샤흐 전투(Battle of Ferozeshah)는 높은 사상자 수를 감안하면 동인도회사의 근소한 승리였습니다.
총사령관 휴 고프
그 원인은 총사령관 휴 고프(Sir Hugh Gough)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책략과 전술이 칼사에 대항하기에는 구식이었고, 흰색 긴 외투 피스 헬멧을 쓰는 등 전투복도 희한했다고 합니다. 36시간에 걸쳐 시크 수비대를 공격하고 3천 명의 동인도회사 사람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으나 결국에는 전투에서 이깁니다.
총사령관 해리 스미스
1846년 1월 중순에는 총사령관 해리 스미스(Harry Smith)가 시크 요새를 점령해 대포를 차지하고 부도왈 전투(Battle of Bhudowal)를 치르며 시크군의 능력을 축소합니다.
알리왈 전투와 소브라온 전투
그 후 1846년 1월 28일, 알리왈 전투에서(Battle of Aliwal) 기병대 창기병들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둡니다. 2월 10일, 고프 장군은 전쟁 사상 최대의 군대를 불러 모아 소브라온 전투(Battle of Sobraon)에서 강력한 시크의 칼사(Khalsa) 군대와 2일간 전면전을 벌여 대승리를 거두었으며, 마침내 3월이 되자 전쟁이 끝났습니다.
3. 시크 전쟁의 특징
시크 제국의 내부 약점
우선 시크 제국의 약점은 내부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명의 주 지휘관이었던 총사령관 테지 싱(Tej Singh)(1799-1862)과 랄 싱(Lal Singh)(d.1866)은 동인도회사의 승리는 시간문제였다고 생각해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고, 자원과 전술도 제대로 쓰지 않았습니다. 영국이 펀자브를 점령하자 관리직을 단단하고 튼튼하게 해 둡니다.
100캐럿이 넘는 다이아몬드
또 다른 특징으로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를 들 수 있겠습니다. 시크 전쟁이 끝난 후 동인도회사는 보상으로 코이누르(Koh-i-Noor) 다이아몬드를 획득합니다. 105.6캐럿의 이 거대한 보석은 1855년 당시 10살이었던 듈리프 싱(Duleep Singh)의 소유였는데, 평화 조약의 조건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문제 때문에, 2023년 5월 6일 치러졌던 영국 찰스 3세의 대관식에는 인도를 비롯한 국가들의 반감으로 이 코이누르 다이아몬드가 박힌 왕관을 재사용하지 않고 퀸 메리 왕관을 다시 사용했습니다.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춘 시크교도
또한 시크 군인들의 뛰어난 무술 실력에 감명받은 영국은 수많은 시크교도를 군대에 영입했습니다. 1858년 세포이 항쟁 후 병사로 신뢰할 수 있는 집단이 바로 시크교도였으며, 1차 세계 대전까지 인도 군대의 70만여 명이 펀자브 출신이었습니다.
4. 시크 전쟁의 결과와 영향
동인도회사의 직접적인 남쪽 영토 통치
동인도회사는 펀자브를 후원국으로 설립해 시크 제국의 수트레지강 남쪽 영토를 직접 동인도회사의 통치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달리프 싱(Daleep Singh)은 이름만 공식 시크교도의 마하라자(군주)로 남았습니다. 한편 시크 군대는 영원히 축소되고 대포는 전부 몰수되었으며 더는 외국 용병들을 모집할 수 없었습니다. 반대로 동인도회사는 엄청난 배상금을 받았고, 잠무(Jammu)와 카슈미르(Kashmir)를 점령했습니다.
가혹한 조약을 맺은 시크
3월 9일 서명한 라호르 조약(Treaty of Lahore)을 살펴보면, 펀자브는 절대 독립국이 되지 못하며, 왕자는 족쇄에 묶이며, 영국 허락 없이는 펀자브는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한다는 등 의도적으로 가혹한 조건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이에 시크는 더 잃을 게 없었기에 1848년 4월, 2차 영국-시크 전쟁(1848-1849)이 시작되었습니다. 한때 시크 제국이 있었던 남쪽과 서쪽에서 양측은 크게 싸웠습니다.
펀자브 전체를 합병한 동인도회사
1849년 1월 13일, 칠리안왈라(Chillianwala) 전쟁을 포함해 세 번의 주요 전투와 한 번의 포위를 겪은 후, 결국 동인도회사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후 영국은 계속해서 전진해 펀자브 전체를 합병하고 1849년 3월 북서 경계를 통제했으며, 식민정부의 관료들은 란지트 싱이 한때 최고 통치자로 누렸던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영국의 직접적 통제와 인도 전역 소유
시크 전쟁의 결과로 영국이 직접적인 통제나 보조 동맹을 통해 인도 전역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데에 시크 전쟁의 의미가 큽니다. 그리고 이 두 번의 영국-시크 전쟁은 동인도회사가 치렀던 전쟁 중 가장 처참하고 비싼 전쟁이었습니다.
(참조 문헌: World History Encyclopedia, 시크 전쟁 편, 위키피디아)